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금석(이금석)

  • 군별 : 육군
  • 계급 : 하사
  • 군번 : 230638
  • 전몰일자 : 19510518

공훈사항

이금석 하사는 1931년 12월 12일에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소속 부대와 군번, 그리고 전사 일자를 고려할 때 이 하사는 1950년 10월경 입대 후 부산의 제2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9사단 수색 중대에 배치되었다.
제9사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어 11월 23일부터 12월 17일까지 전북 대둔산 지구 및 충남 일대와 경북 서부지역 공비소탕 작전에 투입되어 대둔산 지구 및 충남 일대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사단은 12월 19일부로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38도선 상의 강원 인제군 원대리-현리-서림을 잇는 선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 당시 제9사단은 제3군단에 배속되어, 원대리-서림을 잇는 방어진지에서 북한군 제10사단과 격전을 벌이다 상급부대 명에 의거 영월-삼척 선으로 철수하여 정선군 창리 일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37도선 일대에서 적군과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고, 제9사단은 강원 정선 일대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후 제9사단은 3월 5일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안동 일대까지 침투했다가 북상하는 북한군 제10사단이 두타산(1,361고지) 북쪽의 삼화리를 경유해 북상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 하사와 연대 장병들은 3월 12일 송계리에 투입되었다.
유엔군은 4월에 접어들어 38도선 상의 유리한 방어지역인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잇는 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고, 제9사단은 4월 중순 하진부리 일대까지 진격했다. 이후 제9사단은 4월 25일부로 제3군단에 배속되어 미 제8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5월 7일 미주리(Missouri)선(가리봉산∼인제 북방∼원통 북방∼미시령∼속초를 잇는 선) 확보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고, 제28연대는 인제 남방의 598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 무렵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 징후가 포착되어 사단은 방어로 전환했다.
중공군은 5월 16일에 현리 일대의 국군 정면에 전투력을 집중하여 5월 공세를 개시했다. 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선점된 가운데 연대는 현리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속사리로 철수했지만 이 전투에서 이 하사는 적탄에 맞아 1951년 5월 18일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금석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120-ㅈ-00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