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금석(李金石)

  • 군별 : 육군
  • 계급 : 일병
  • 군번 : 0338827
  • 전몰일자 : 19501027(전사자 명부에는 1950-10-27로 되어 있으나, 제15사단 제39연대 창설 전

공훈사항

이금석 일병은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에서 출생했다(출생 일자 미상). 그는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시기에, 조국과 자유를 지키고자 1951년 12월경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제7사단 제3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일병이 부대에 배치될 무렵 전황은 유엔군이 38도선 일대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제7사단은 1951년 11월 20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백석산 북방의 1,090고지~931고지~암동~319고지를 있는 전선을 맡아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연대는 1952년 2월 11일 중공군을 크리스마스고지로 유인하여 타격을 주려 하다가, 오히려 적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13일까지 수차례의 공방전을 펼친 끝에 동 고지를 지켜냈다.(제2차 크리스마스고지전투) 이 전투에서 이 일병은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한·미는 미군 재보충이 어려운 상황과 휴전 후의 한국 국방을 고려하여 1952년 초부터 육군을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증편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4월 28일 3개의 경장비 교육보충연대(제37·38·39연대)가 창설되었고, 6월 13일 다시 같은 성격의 3개 연대(제50·51·52연대)가 창설되었다. 제39교육보충연대는 거제 포로수용소 경비 임무를 수행했고, 부상에서 회복한 이 일병은 이 연대에 배치되어 수용소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에 충돌이 수시로 발생했고, 경비병들과의 충돌사태도 잦았다. 1952년 5월 10일 포로수용소장 돗드 미군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저항하는 친공 포로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6·10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사건은 계속 발생했고, 경비병들은 최루탄을 발사하여 이들을 진압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일병은 1952년 10월 발생한 포로들의 폭동사태를 진압하다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10월 27일 끝내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금석 일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15판-5면-152호)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075-ㅁ-083)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