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금산(金今山)

  • 군별 : 경찰
  • 계급 : 순경
  • 군번 :
  • 전몰일자 : 19520601

공훈사항

이금산 순경은 1924년 4월 9일 출생했다(출생 장소 미상). (경찰 입문 일자 미상). 그는 전몰 당시 지전사 소속으로 재직 중 하동에서 전사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9월 16일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이 개시되자 남·북의 전세가 역전되면서 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 제10사단 패잔병 약 3,400명과 남로당 제1지대 유격대 약 1,700명, 제3지대 유격대 약 450명, 이현상의 남부군 약 450명이 지리산 일대로 잠입했다.
1950년 9월 이후로 공비들은 종래 소수 병력으로 목표를 기습한 후 분산 잠적하던 상용전법을 사용하지 않고 대담하게 집단병력으로 소도시와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촌락을 일정기간 점령하여 물자와 식량을 약탈했다. 심지어 백주에 부락민을 강제 동원하여 곡물을 추수하게 한 다음 현물세 명목으로 약탈하기도 했다. 이에 군은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투입, 육군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전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1950년 12월 1일부터 공비토벌에 임하게 하였다.
국군·유엔군의 총반격으로 압록강까지 북상했던 전선이 중공군 제2차 공세로 인해 다시 남하하자 1951년 1월 3일 치안국은 대구로 철수하여 32개 전투경찰대대를 편성하여 군의 주보급로 경비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비상경비총사령부는 공비섬멸작전 특별기간(제1차 3월 10일~4월 10일, 제2차 4월 15일~5월 25일, 제3차 7월 15일~8월 15일)을 설정하여 태백산과 지리산을 비롯한 전국의 공비소탕작전에 돌입했다. 당시 이 순경은 제1·제2·제3차 지리산 지구 공비섬멸작전에 모두 참가했다.
국군은 서남 방면에서 육군 제8사단의 공비토벌작전 완료 이후에도 계속 준동하는 공비를 소탕하고 아군의 보급로 경비와 치안 확보를 위해 1951년 9월 16일 경북 경주에서 육군과 경찰병력으로 구성된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를 창설했다. 사령부는 전북 남원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하고 지리산 일대에서 4기에 걸쳐(제1기: 1951.12.2.~12.14., 제2기: 1951.12.16.~1952.1.4., 제3기: 1952.1.4.~1.31., 제4기: 1952.2.4.~3.14.)공비소탕작전을 전개했는데, 이 순경은 전 기간에 공비소탕작전에 참여했다.
3차례에 걸친 공비섬멸에도 불구하고 산악지역에 근거를 둔 공비들의 활동이 여전히 계속되었다. 1952년 6월 1일 이 순경의 소속부대는 지전사(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하동군 악양면 지역 공비토벌에 참가했는데, 당시 이 순경은 공비들을 격멸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금산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사자 명비(093-ㅁ-061)에 이름을 새겨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