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이금돌(李金乭)

  • 군별 : 육군
  • 계급 : 이등상사
  • 군번 : 0751852
  • 전몰일자 : 19511016

공훈사항

이금돌 이등상사는 1921년 2월 22일에 출생했다(출생장소 미상).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에 수립되었음에도 정치 및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1949년 7월 중순, 서울 용산에 위치한 제19연대로 입대하여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하고 예하 대대로 배치되었다. 이후 연대는 1950년 4월 19일에 원주로 이동하여 제6사단에 예속되었고, 이곳에서 교육훈련에 집중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에 기습적으로 침략했을 때, 이금돌 이등상사가 소속된 제19연대는 원주에서 춘천으로 신속히 투입되어 제7연대를 지원했고, 그리고 홍천으로 투입되어 제2연대를 지원했다. 그리고 6월 30일에 원주로 철수하면서 충주-문경 축선에서 7월 한 달 동안 지연전을 수행했고, 8월 1일에 낙동강방어선을 점령하여 8월과 9월 동안에 신녕 북방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북한군을 추격하여 10월 1일에 원주를 탈환하고, 10월 말에는 선두부대가 압록강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여 동두천 북방의 백의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제6사단은 1950년 12월 31일 야간에 시작된 ‘중공군의 제3차 공세(신정공세)’로 다시 장호원 부근 적산리 일대로 철수했다. 이후 사단은 2월 11일 시작된 ‘중공군의 2월공세’, 4월 22일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 5월 16일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를 공세적인 방어로 격퇴하고 5월 20일부터 반격으로 전환했다. 사단 장병들은 5월 28일에 화천저수지까지 진출하였고, 6월 15일에는 백암산까지 진출하여 철의 삼각지대의 우반부인 등대리-단거리-수리봉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제6사단은 1951년 가을이 되면서 휴전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제2연대가 9월 21일부터 주방어선 전방의 819고지를 공격했고, 이어 제19연대가 9월 24일에 공격하여 28일까지 치열한 전투 끝에 819고지를 탈취했다. 이날 전투에서 그는 중대선임하사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대구에 위치한 제1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곳 병원에서 의료진들에 의해 정성스런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0월 16일에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故 이금돌 이등상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086-ㅍ-110)에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